06. 지그문트 프로이트-6

    '꼬마 한스 이야기'의 뒷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1922년, 한스는 19세가 되어 프로이트를 찾아와 말한다. "제가 꼬마 한스예요." 그는 잘 지내고 있고 특히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곤경과 사춘기를 잘 견디어 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순진성을 침해당하며 정신분석학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그 가엾은 꼬마 소년에 대하여 '온갖 불행을 예고'한 1909년 당시의 분개한 비평가들에게 이 결과를 들이댈 수 있었으니, 가히 만족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 베르주레는 헤르베르트 그라프가 1970년 다시 나타나 제네바 회의의 안나 프로이트에게 똑같은 말, "제가 꼬마 한스예요"라며 인사하는 장면을 기술하고 있다. 베르주레의 저작은 1909년의 분석에서 언급되지 않은 부분을 깊이 파헤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이 경우 근본적인 폭력 문제를 밝히고자 한다. 프로이트에게 이 치료는 바로 자신의 자기 분석을 연장한 것이었으며 프로이트는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자신의 아동기가 한스에게서 충실한 이미지로 존재함을 발견했다고 베르주레는 주장한다. 우리는 이 주장이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한스 헤르베르트 그라프의 자서전인 [보이지 않는 자의 회상록] 또한 재미있다. 작가이자 음악 비평가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한스는 구스타프 말러가 대부였으며 오페라 가수, 연출가와 같은 풍부한 직업 활동을 했다. 그는 1936년부터 1950년까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연출을 맡았다. 개인적 일생에서도 특별히 불행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1973년에 사망했다.



    이제 1909년의 빈 정신분석학회로 돌아오자. 5월 12일의 학회에서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우리는 아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스 이후에야 우리는 아동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생각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라고. 라이틀러는 부모를 규탄하는데, 이는 그 당시 매우 흔한 일이었고 그러므로 그리 현대적인 개념은 아니었다. "교육에 오류가 있었고 바로 그 오류로 인해 신경증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막스 그라프는 이때 학회에 참석하고 있었고 다음과 같이 변론한다. 한스는 "성에 대한 강한 성향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래서 사랑에 대한 필요가 매우 이른 시기에 생겼다. 그 사랑은 부모에게 너무 강하게 집착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도 그를 변호한다. "오류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고, 범한 오류도 신경증과 그리 깊은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선천적 문제가 있음은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즉, 한스는 '성에 대한 강한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프로이트의 수많은 제자가 자기 자녀를 연구했다. 1906년 10월 이전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어 유감이다. 그런데, 1906년 11월 7일 이후부터, 일반의사 바스의 아이가 2살이 되기까지 빛에 극도로 예민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냥불이 갑자기 켜질 때마다 그 아이는 재채기했다.



    1907년 1월 23일, 페더른은 13살 된 자신의 아이가 몇 가지 음식을 혐오했는데,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혐오에 해당한다고 관찰하고 있다. 3월 27일, 라이틀러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듯한 8~9세 소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소녀는 유뇨증(遺尿症)이 있었는데, 남자 형제들과 아버지의 요강을 사용한 후 '피가 나도록' 몸을 씻는 강박적 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1909년 5월 12일, 꼬마 한스를 주제로 열리는 학회에서 바스는 계속 소재를 제공한다. 자기 아들이 '그것에' 대해서는 어머니하고만 이야기하며, 여자가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아기가 생긴다고 믿는다는 것이었다.



    1909년 11월 17일, 헬러가 자기 자녀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관찰되는 증상으로는 구토, 화장실 안에서 오래 있기 등이 있으며, (남자 형제를) 물려는 충동과 입맞춤에 대한 '기이한' 혐오증도 있었다.



    1910년 3월 16일, 프리트융은 여섯 살 반쯤 된 소년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자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페니스가 발기된 것을 느꼈나 보다. 거기에서, 키 크고 검은 남자가 자기 가슴에 막대기를 박는 꿈이 생겼다. 또한 부모의 성교 장면을 엿보았던 것 같다. 이후 어떤 꿈을 꾸고 나서 소년은 신음을 내는데 성교 중 어머니가 내는 소리와 비슷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토론을 더는 진행하지 않았다. 그것은 프리트융이 아이에게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암시적' 질문을 하기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1914년 2월 25일, 바이스는 한 살을 약간 넘긴 남아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 아기는 어머니가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를 끄르려 했다. 타우스크는 한 여아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 여아는 타우스크의 등에 올라탔다가, 어머니가 들어오자 당황하면서 "이런 일은 하는 게 아니야"라고 말했다. 페더른은 두 아동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젖가슴은 성적 가치를 지녔다. 프리트융은 한 남아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 남아는 남자 손님들에게는 항상 빈정대는 말을 하지만, 여성 손님들에게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작스는 새엄마에게 정신없이 사랑에 빠진 7~8세 소년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3월 18일, 페더른과 바이스는 자신의 아이들에 대하여 재차 언급한다. 타우스크, 프리트융, 바이스, 란다우어는 5월 20일, 관찰 소재를 계속 보고한다.



    우리가 이렇게 발췌해 본, 빈 정신분석학회의 순간에 대한 기록은 오토 랑크의 속기술 덕분에 그나마 보존된, 화석과도 같은 잔해에 불과하다. 정신분석학자들이 자기 자녀들을 관찰한 기록은 수없이 문서화되었을 분명하나, 아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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